고려(중기정치부터 무신정변까지)

안녕하십니까? 소호의 세상입니다. 오늘은 고려 중기정치부터 무신정변까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문벌 사회의 성립과 동요

문벌 사회의 성립

문벌사회는 고려초기를 지나면서 지방 호족와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 되면서 여러 세대에 걸쳐 중앙에서 고위 관직자를 배출한 가문이 문벌을 형성하였다. 정치, 경제적인 기반이 바탕이 되었는데, 정치적으로는 과거와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해 정치 권력을 독점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직역의 대가로 국가로부터 받은 토지와 녹봉과 권력을 이용한 토지 확대로 경제력을 독점하였다. 폐쇄적인 혼인 관계를 맺고,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외척으로 성장하며 자신들의 세력을 넓혀 나갔다.

문벌 사회의 동요

문벌세력이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독점하면서 권력을 둘러싸고 문벌 간에도 갈등이 발생하게 되고, 과거제를 통해 등용된 세력과 개경문벌간에도 대립이 발생하면서 동요가 발생한다.

이자겸의 난

배경은 경원 이씨 가문이 왕실과의 중첨된 혼인 관계를 통해 유력한 외척 가문으로 성장, ㅇㅣ자겸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벌어졌다. 국왕의 측근 세력이 국왕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이자겸을 제거시도를 하였지만 실패하게 되었고, 이자겸이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서 권력을 장악한다. 이 과정에서 금의 사대요구를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 후 인종이 척준경을 회유해 이자겸을 잡아 들여서 유배 보내고 척준경 역시 탄핵을 받아 축출된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이자겸의 난 이후 개혁적인 서경세력과 보수적인 개경세력이 대립하게 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묘청과 정지상은 불교와 풍수지리설을 이유로 수도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천도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치게 되고, 금에 대한 사대 또한 비판하며 금을 징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또한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김부식 등의 개경파는 유학사상을 본받아 금에 대한 사대를 인정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묘청등이 서경천도를 추진하였지만 개경세력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가자 묘청이 서경에서 난을 일으켜 국호를 대위로 하고 연호를 천개로 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김부식이 이끈 관군에 의해 진압된다.

이 이후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에서 ‘조선역사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 이라고 평가하게 된다.

무신 정권의 성립

무신정변

1170년에 발생한 보현원에서 정중부, 이의방등 무신들이 일으켜 무신들이 중방을 중심으로 주요 관직을 독점한 사건이다. 일어나게 된 배경은 문벌사회의 모순심화, 문신의 무반 고위직 독점, 무신에 대한 차별, 하급 군인들의 불만 고조, 의종이 실정이 있다.

무신정권은 초기에는 집권자의 잦은교체가 있었고,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는 최씨의 무신정권이 자리잡게 된다. 최충헌은 권력을 잡은 후에 봉사10조를 만들어 사회 개혁안을 제시하였고, 아들인 최우에게 권력을 세습하게 된다. 최씨 무신정권은 4대를 걸쳐 약 60여년간 계속되었다.

무신 정권의 권력 기구

정치적으로는 교정도감, 정방과 서방이 있었다. 교정도감은 최충헌이 설치 하였으며,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권력기구였다. 우두머리인 교정별감이 최고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이 교정별감은 최고 집권자가 겸임하게 하였다. 정방은 최우가 설치 하였으며, 인사행정 기구로써 인사권을 장악하는 기구이다. 서방은 최우가 설치 하였으며, 문인을 등용하여 국정자문과 외교문서를 작성하게 하였다.

군사적으로는 도방과 삼별초가 있었는데, 도방은 왕의 신변보호를 위한 사병집단으로써 경대승이 처음 만들었고, 이의민때 해체되었다가 최충헌이 부활 시켰다. 삼별초는 최우가 개경의 치안유지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에서 시작되어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구성 되었고 정권유지를 위해 활용 되었다.

무신 집권기 사회 동요

무신 집권기에도 무신간의 권력 다툼과 지방통제력 약화, 하층민에게 과도하게 세금부과, 무신의 수탈 등으로 인해 사회적인 동요가 발생하게 된다. 농민의 저항으로는 망이 망소이의 난과 김사미 효심의 난이 있다. 망이 망소이의 난은 정부가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켜 무마시도 하다가 무력진압에 의해 실패하였다. 천민의 저항으로는 만적의 난과 전주 관노비의 난이 있다. 만적의 난은 사노비인 만적이 개경에서 봉기를 시도한 난이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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