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외교

안녕하십니까? 소호의 세상 입니다. 오늘은 고려의 외교관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려의 대외관계

거란의 침입과 격퇴(10세기~11세기)

거란의 침입은 크게 총 세차례가 있었다. 거란이 침입한 처음 배경은 고려의 북진정책과 친송 정책, 거란이 송을 공격하기에 앞서 고려에 송과의 관계단절 요구가 그 배경이었다. 1차 침입은 고려 성종때 소손녕이 군대를 이끌고 거란을 침입하였다. 그때 바로 전쟁을 하기보다 서희가 나서보겠다고 하여 서희와 소손녕이 외교 담판을 벌이게 되었고, 서희는 거란군을 돌아가게 한 것 뿐만 아니라 강동 6주 까지 확보하게 된다.

거란의 2차 침입은 고려 현종 때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입하게 된다. 강조의 정변은 강조가 목종을 폐위 시키고 현종을 즉위시킨 사건을 말한다. 거란군의 2차 침입으로 인하여 개경이 함락 되었고, 현종은 나주로 피란을 가게된다. 이때 양규라는 장군이 나서 거란의 침입을 막게 되었다.

거란의 3차 침입은 고려 현종때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소배압이 군대를 이끌고 침입하였다. 이때 강감찬 장군이 귀주산성에서 나서서 막아내었다.

거란의 침입으로 인한 영향은 고려와 송나라, 거란 사이에 세력 균형이 유지 되었고, 개경에 나성 축조, 국경지역에 천리장성이 축조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거란군을 무찌르길 바라는 염원이 담긴 초조대장경이 제작되었다. 초조대장경은 이후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불에 타서 소실 되었다.

여진과의 관계(12세기)

여진과의 전쟁은 12세기 여진이 성장하면서 잦은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하여 고려 숙종때 윤관의 건의로 신기군(기병), 신보군(보병), 항마군(승병)으로 구성된 별무반이 편성 된다. 그 이후 예종때 윤관이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게 되고, 그 결과 동북지방에 9성을 축조 하였다(1107)

그 이후 여진족의 계속된 침입과 반환요청이 있었고, 여진이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하여 1년 만에 여진에 9성 지역을 반환하였다.

그 이후 여진이 금나라를 세우고 거란을 멸망시킨다. 금나라를 세운후에는 고려에 군신관계를 요구하게 되고 그때 집권자였던 이자겸이 정권 유지와 전쟁방지를 위해 금의 사대요구를 수용하게 된다. 그 일로 개경파와 서경파의 대립이 발생하고 묘청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몽골과의 전쟁(13세기)

몽골과는 초기에는 연합하여 고려에 침입한 거란족을 토벌하는 관계였다.(강동성 전투) 그리하여 몽골과 국교를 체결하여 외교하다가 몽골이 점점 자나친 공물을 요구하게 되고, 몽골사신인 저고여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몽골군의 침입이 일어나게 된다.

몽골군이 1차 침입때는 최우가 이끌던 고려 정부는 강화로 천도하여 장기 항전에 대비 하게된다. 또한 부처의 힘으로 몽골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팔만대장경의 조판도 이루어진다. 그 이후 박서(귀주성 사수), 김윤후(처인성 전투에서 살리타 사살), 충주성 전투(김윤후, 노비와 천민중심), 충주 다인철소 주민의 저항 등 여러 번의 항전이 이어졌다. 그 영향으로 국토가 황폐화 되고, 문화재가 소실(초조대장경 소실, 황룡사 9층목탑)되었다.

또한 고려정부의 개경환도에 반발하여 삼별초의 항쟁이 있었는데, 몽골군에 맞서 강화도, 진도, 제주도까지 근거지를 옮겨가며 항전하였지만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고려는 원간섭기로 접어들게 된다.

고려 후기의 사회 변동

원 간섭기

먼저 영토축소가 이루어졌는데, 쌍성총관부와 동녕부, 탐라총관부를 빼앗겼고, 왕실칭호와 관제또한 격하되었다. 고려왕이 원의 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국으로 불리게 되었고, 왕실 호칭 또한 짐을 고로, 폐하를 전하로 부르게 되었다.

원의 내정간섭으로 인하여 원이 다루가치라는 감찰관을 고려에 파견하였으며, 정동행성을 설치하여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기구를 고려에 두게 되었다. 충렬왕때 고려와 몽골 연합군이 두차례 일본 침입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정동행성은 고려를 감시하는 기관으로 남게 된다.

한편 고려에는 원나라의 권력을 등에 업고 고려의 행정 실권을 장악하는 권문세족이라는 새로운 권력이 나타나게 된다. 권문세족은 도평의사사와 정방을 장악하고, 음서제를 통해 대대로 권력을 세습하며 유지하였고, 공음전을 통해 쌓은 부로 대농장을 소유하게 된다.

고려 내에서는 몽골풍이라는 변발과 호복 같은 몽골 풍습과 소주, 만두등 몽골 음식이 전래되었고, 몽골에는 고려양이라는 떡이나 두루마기 같은 고려의 풍습이 전래 되었다.

고려의 개혁노력

고려는 몽골의 원간섭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많이 하였는데, 공민왕때 기철 등 친원세력을 숙청하고, 중서문하성과 상서성 등의 고려의 관제를 복구하고, 몽골풍을 금지시키는 노력을 하였다. 또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수복하게 된다.

공민왕은 권문세족을 경계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재정기반을 확대하였고, 정방을 폐지하고 신진시대부를 등용하여 국왕이 인사권을 장악하게 된다.

고려의 멸망

14세기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안동까지 피신하게 되었고, 왜구의 침입으로 홍산대첩, 진포대첩, 황산대첩 등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 이성계와 같은 신흥 무인세력이 성장하게 되었다.

우왕때 우왕과 최영이 명나라의 요동정벌을 단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우며 반대하게 된다. 정벌하러 가던 이성계가 군대를 이끌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우게 된다.(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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