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외교)

안녕하십니까? 소호의 세상입니다. 오늘은 조선전기의 외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초기의 대외관계

사대

1. 명나라 : 건국 초 태조와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주장하였다. 그 이후 태종 때 부터 사대 외교를 전개하였다. 일종의 공무역으로써 조선이 명나라에 조공을 하고 명나라는 그에 대한 답례를 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교린

1. 여진 : 여진에 대한 강경책으로는 세종때 최윤덕과 김종서를 보내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그 이후 사민정책과 토관제도를 실시하여 조선의 농민을 그 지역으로 가서 농사짓도록 하였으며 그 지역에 살던 사람을 관리로 뽑아 행정업무를 하게 함으로써 여진 지역의 백성들이 조선에 융화되도록 노력하였다.

여진에 대한 온건책으로는 귀순을 장려하여 관직과 토지를 수여하고, 사절왕래를 통한 무역을 허용하였으며, 북평관을 한성에 설치하여 여진 사신들이 묵을 수있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태종때 경원과 경성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국경지역에서 무역을 허용하였다.

2. 일본 : 일본에 대한 강경책으로는 세종 때 이종무를 보내 쓰시마섬을 정벌하였다.

일본에 대한 강경책으로는 한성에 동평관을 설치하여 일본 사신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하였으며, 3포를 개항하여 무역 할 수 있도록 하였고, 세종 때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제한된 범위 내에서 무역을 허용하였다.

임진왜란의 전개

왜란이전

1. 3포 왜란 : 중종때 발생한 왜란으로 이 결과 비변사가 임시적으로 창설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2. 을묘왜변 : 명종때 발생한 왜란으로 이 결과 비변사가 임시기구에서 상설기구화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왜란의 전개

1. 발생 :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정세를 파악한 후, 조총으로 무장하여 조선을 침략하였다.

2. 임진왜란 : 왜군이 침략 후 부산진과 동래성이 함락 되었다. 그 이후 신립이라는 장군이 충주에서 탄금대전투에 투입되었지만 패하게 되었고, 그 결과 선조는 의주로 피란을 가게된다.

수군의 활약이 이어지는데 먼저 옥포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의 첫 승리를 하게되고, 이어서 한산도 대첩에서 학익진 전법을 사용하여 일본에 대승을 거두게 되며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다.

또한 의병의 활약이 이어지는데, 의병들은 자발적인 조직으로 향토지리에 잘맞는 유격전을 전개 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홍의장군이라고 불리는 곽재우, 북관대첩의 정문부, 고경명, 조현 등이 있다.

그 이후 명나라에서 군대를 보내어 힘을 보태 주었으며 조선 또한 관군을 재정비 하여 끝까지 맞써 싸우게 된다. 진주대첩의 김시민, 그 이후 평양성 전투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싸웠으며, 행주대첩에서 권율이 마지막으로 맞써 싸운 결과 명나라와 일본은 휴전협상을 하게 된다.

3. 정유재란 : 1597년에 휴전 회담이 결렬된 후 왜군이 재침입을 하게 되면서 일어나게 되었다. 명량대첩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활약하면서 끝내 조선이 승리하게 된다.

4. 군사조직의 변화 : 5위. 영진군에서 5군영. 속오군으로 바뀌게 되었다.

훈련도감(5군영) : 포수, 살수, 사수의 삼수병으로 구성되어 있고, 장기간 근무하며 일정한 급료를 받는 직업군인의 성격이다.

속오군 : 양반부터 노비에 이르고, 비상상황에 동원되는 예비군이다.

광해군의 정책

전후복구사업

농지 개간을 장려하고, 토지와 호적조사를 시행 하였다. 또한 공납을 쌀로 거두는 대동법을 경기도에 한하여 실시하였다. 그로 인해 공납의 폐단을 겪으며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또한 허준과 함께 동의보감을 편찬하여 의학서적을 완성시켰으며, 불탄 사고를 다시 건립하기도 하였다.

교역재개

에도 막부에서 통교 허용을 요청하여 기유약조를 체결하였다.

중립외교

후금의 공격을 받는 명나라가 조선에 지원병을 요청하여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상황을 보고 실리적으로 대처 할 것을 명령하면서 사르후 전투에 투입하였다. 또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실리적. 중립적 외교를 추진하였다.

인조반정

인조반정은 광해군의 중립외교로 인해 명에 대한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서인 등의 사림의 반발이 있었고, 새어머니인 인목대비를 덕수궁에 유폐하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살해한 폐모살제 사건을 명분으로 삼아 서인이 광해군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호란의 전개

정묘호란

1. 배경 :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후 서인정권의 친명배금 정책으로 후금을 자극하였고, 인조반정을 일으킨 이괄이 2등 공신으로 책봉 된 것에 앙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후 후금으로 도망간 것을 빌미로 일어나게 되었다.

2. 경과 : 후금이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 이후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였으며, 용골산성에서 정봉수와 이립이 의병을 이끌고 항전하였다.

3. 결과 : 후금과 조선이 형제의 맹약을 맺으며 강화가 성립되었다.

병자호란

1. 배경 : 후금이 성장한 후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 해왔다. 조선 정부 내에서 주화파와 척화파가 대립하면서 의견이 갈렸고, 그 결과 조선이 ‘청’으로 국호를 바꾼 후금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2. 경과 : 청태종이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고, 임경업이 백마산성에서 항전하였지만 청군이 한성으로 진격하여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5일간 항전하게된다. 김준룡이 용인광교산에서 항전하였고, 김상용이 강화도에서 순절 하였지만 끝내 패배하였다.

3. 결과. 영향 : 삼전도에서 청나라와 조선이 강화를 체결 하였고, 청과 군신관계를 맺게 된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고초를 겪었다. 그 영향으로 조선내에서는 북벌론이 대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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